

국궁 유래
우리민족은 2천년이상이나 각궁의 전통을 이어 받아
고유의 민족궁을 쏘고 있는 유일한 민족이다.

민간사정이 번창하여 활쏘기가 대중화, 민속화 되는 결정적 계기는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이다.
서양의 조총으로 공격해 온 일본군 때문에 고전을 해온 임진왜란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선조임금은 전쟁이 끝나자 국민들에게 활쏘기를 권장하며 경북궁안에 사정(五雲亭)을 만들어 민간인들에게 개방을 했다. 이것이 효시가 되어 전국각지에 민간사정이 건립되었고 서울 장안에만도 무려 48개의 민간사정이 서기에 이른다.
경기도 지방 농촌 마을에 까지 활쏘기 문화가 확산된 것도 이때 부터이다.
선조임금은 국민들에게 활쏘기를 권장함으로써 호국정신 함양고 국민 체력증진을 바랬던 것이다.
조선시대 민간사정을 중심한 활쏘기 문화는 17~18세기에 전성기를 이루지만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쇠퇴하기 시작하는데 1894년 갑오경장으로 조선군대의 무기체계에서 활과 노(努)를 해제하게 됨으로써 결정적으로 몰락하기에 이른다
무과지망 젊은이들이 활을 외면하고 활쏘기는 타파되어야 할 구습으로 인식되는 시대 상황에 몰리게 된다. 그래서 지방의 관영 사정들은 폐쇄되고 도시의 민간사정들이 쇠퇴 몰락하여 폐허가 되고 있덨다. 1895년 민비시해사건 이후 덕수궁으로 거처를 옮긴 고종황제는 울적할 때마다 경희궁으로 가서 군사조련 관경을 보며 활쏘기를 즐겼다.
고종황제는 전국적으로 활쏘기 문화가 쇠퇴몰락하고 있다는 소식에 접하자 1899년에 <활이 비록 군대의 무기에서는 제외 되었다고해도 국민의 호국정신 함양과 체력증진을 위한 활쏘기는 권장해야 한다>는 취지의 윤음(임금의 지시)을 내리게 된다.
이때 고종황제는 자신이 활을 쏘던 경희궁 안 활터에 민간사정인 황학정을 건립토록 지원한다. 고종황제의 활쏘기 권장으로 황학정이 건립되자 각지에서 폐쇄몰락했던 민간사정들이 다시 일어서게 된다.
황학정이 전국 사정의 종가(宗家)와 같은 위치에 놓이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